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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넉넉하지 못했지만 행복했다"




어릴적 우리 집은 넉넉하지 못했다.

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.


편모 가정에 자랐으나, 나에겐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들이였다.

그 뒤엔 어머니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으니 가능했다 하겠다.


어린 시절 시골로 이사를 간 나는 시골 친구들에게 그냥 하얀 멋쟁이 서울 촌놈이였다.

물론 서울에서 이사간건 아니였지만 그 어릴땐 서울인줄 알았다.


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도 그들과 같은 시골 촌놈이 되었다.

사춘기 시절이 되며 내가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니,

그건 바로 누나들이 있는 친구들이였다.

이유인 즉슨, 그 친구들은 이쁜 옷들을 많이 입고 다닌단 것이였다.


달달이 용돈이 없던 나에게 이쁜 옷을 살 여유는 없었으며,

그 시절엔 어디서 사야 이쁜 걸 사는지도 몰랐다.


그렇게 이쁜 옷을 입고 싶어하던 내 사춘기를 보고 있던 내 어머니의 맘은 오죽했으랴.


옷이 별로 없던 내게 겨울이 가장 문제였다.

항상 똑같은 겨울 옷을 입어야한다는게 너무 싫었었다.

그래도 학교는 가야했다.


내가 초,중,고를 지내며 입었던 기억에 있는 겨울자켓은 초록색 코듀로이에 솜 들어간 지퍼달린 잠바, 보라색 지퍼 달린 여자 솜옷, 파란색 오리털 파카가 다였다.


초록색 코듀로이 잠바는 후드가 달려 있었다.

초등학교때 부터 소매가 짧아질때까지 입다가 중학교가서야 못 입게 된거 같고,

어머니는 어디서 보라색 여자 아이의 겨울 솜옷을 가져 오셔서는 괜찮다고 입으라 하셨다.

그때 난 그 옷의 색과 핏이 맘에 들었었다. 

친구가 내가 여자 옷을 입었다라고 손가락질 하기전까진 말이다.

마지막으로 파란색 오리털 파카는 따뜻하고 좋았다. 

하지만 파랑색도 아닌 하늘색도 아닌 어중간한 색이 맘에 안 들었으며 펑퍼짐한 핏이 너무 싫었다. 

하지만 그때까지도 나에게 이쁜 입을 결정권은 없었을 뿐더러, 

그 당시 어린 내겐 거부할 용기도 없었다.


그때까지 나는 온실 속 화초였다. 

온실 속 화초라 하면 넉넉한 살림에 자랐다라고 생각하겠지만, 그건 절대 그렇지 않았다.

 단지 내 어머니의 노력이 어마 어마 하셨을 뿐이다.


유년 시절은 이랬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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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패턴 메이커다.


"나는 패턴 메이커다(2)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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